island of blow
고둥도둑 본문
제주도의 시골 바닷가 마을은 버스가 아주 늦게 오기 때문에 시간을 아주 많이 들여 갯벌을 관찰할 기회가 생기곤 한다.
자기 몸보다 곱절에 곱절은 더 큰 빈 고둥껍질을 훔쳐 어깨에 이고 살아가는 쪼끄만 게들.
좁쌀보다도 작은 눈으로도 탐지력은 얼마나 재빠른지 아주 작은 위협만 느껴도 금새 미끄러지듯 동굴 안으로 숨어버린다.
그 안에만 잘 숨어있으면 세상이 무너져내려도 거뜬할 거라고 굳게 믿기라도 하는 듯이.
미안한 일이지만 반쯤은 호기심에 그리고 반쯤은 설마하는 마음에 껍질의 한 귀퉁이를 깨뜨려 보았더랬다.
그러자 채 몇 초 지나지 않아서 깨뜨려진 그 귀퉁이 사이로 새로 얼굴을 내밀고선 아장아장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제가 애써 구한 집의 꿈에도 꿈꿔본 적 없었을 리모델링 포인트에 적응이 안 되는지 어거지로 걸으려는 모양새가 아주 우스웠다.
하지만 출입구가 두 개인 껍질이란 결국 통로일 뿐 은신처는 아니었을 거다.
나는 그 녀석이 머지 않아 내가 구멍낸 그 고둥을 미련 없이 버리고 새 집을 구했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삶의 영구한 보호막이란 것에의 의구심도 조금은 고양되었으리라고.
그리고 지금도 갯벌의 어느 한 조용한 웅덩이에서 씩씩하게 잘 살아가고 있으리라고.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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