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land of blow
세화리 제주풀무질 본문
서울 도심 한 귀퉁이에 자리해 있던 사회과학서점 풀무질. 제주도로 이사를 가신다는 얘기를 들은 게 몇 년 전이었던가.
그런데 그 몇 년 간 나도 제주 사람이 되는 신기한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도저히 한 번쯤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곳이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제주풀무질은 또다시 이사를 가야할 처지에 놓여 여러모로 뒤숭숭한 상황인 듯했다.
구석기 시대에서 와서 큐알코드는 없고 수기명부만 쓸 수 있다고 호기롭게 말씀하시는 풀무질 사장님. 역시 변한 게 없으셨다.
내가 서울에서 이 서점을 처음 찾았던 건 17살 때였다.
박홍규 역의 "오리엔탈리즘"을 너무 사고 싶어서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비싼 가격에 못 이겨 내려놓고 나왔던 기억이 있다.
괜한 옛 감상에 잠겨 나답지 않게 카운터에서 분주하신 사장님께 먼저 말을 건네봤다.
"제가 처음 풀무질을 7년 전에 갔었거든요."
"아뇨 풀무질은 프랜차이즈 서점은 아니고요."
"아뇨 프랜차이즈가 아니고 7년 전이요."
"아(장탄식)."
대체 어떻게 해야 "7년 전"이 "프랜차이즈"로 들릴 수 있었을까. 그만큼 독립서점이라는 프라이드가 강하셨던 거라고 추론해 본다.
하기사 프랜차이즈 -라고 쓰고 대기업 자본이라고 읽는다- 서점의 늪에 빠진 출판생태계에 단비 같은 서점인 것만은 분명하니까.
주섬주섬 4권인가를 골라서 다 합쳐 5만원이 넘는 책값을 시원하게 긁고 나오는 길.
돈 벌 시간은 생겼지만 원없이 책 읽을 시간은 없는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에 왠지 씁쓸해졌다.
계산하면서 또 잠깐 나눈 담소 중에도 사장님은 책모임도 모집한다며 거듭 권하셨는데 이른 바 "젊은 사람들"도 꽤 많다고 했다. 흠.
나도 물론 젋었지만 -적어도 외견 상으론- 그럼에도 매주 구좌까지 올 수 있을 만큼 지구력이 어마무시하지는 못 했던 게 한이랄까.
그래도 적어도 올해 안으로는 꼭 한 번은 더 들러보려고 한다.
책을 파는 서점은 풀무질 말고도 많지만 예컨대 "공산주의의 지평" 같은 살벌한 이름의 책을 파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그것이 풀무질만의 매력이고 정체성이고 가치일 것이다. 앞으로도 제주에 잘 뿌리내려 꼭 면면히 이어졌으면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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