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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land of blow

어쩌면 너와 나 사이에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무리 움켜잡으려고 해도 보란 듯이 빠져나가고 마는 거였다. 너도 내가 후회하는 내 어린 시절의 파편들도.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이젠 염치없게도 그립다.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

어디로도 들고 튈 수 없는 일촉즉발의 위기에서조차 절대로 한 번 입에 문 것을 놓치지 않던 젊음의 투지. 네가 너를 좋아했던 건 나보다 100배는 더 작은 몸으로도 나보다 더 살아있다는 것에 감흥할 줄 알던 너의 그 생동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내가 다 갉아버렸다는 걸 네 영혼이 나를 떠난 다음에야 할게 되었어. 지금도 이렇게 우중충하고 흐린 날이면 방문에 실없이 기대 앉아서 네가 바로 내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생각할 뿐이다. 너는 정말로 훌륭한 거북이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안 됐을 만큼.

지가 제발로 기어들어가 빠져놓고도 세상 당당한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꺼내달라 시위하던 사랑스런 꼬맹이. 이 녀석은 내 손가락이 제 손가락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데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할 줄 아는 녀석이었다. 가끔은 내가 번쩍 들어올려주기를 바라면서 일부러 저 안으로 미끄러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곤 했다. 장난치는 걸 좋아하던 어린애였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지금 나도 나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구멍에 빠져 있는데. 너처럼 간철한 눈빛을 쏠 상대도 나한테는 없는데. 그러니까 나는 대체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지 이젠 네가 좀 알려주면 안 될까. 이 멍청한 천재 같은 녀석아.

오늘 아침엔 바닥에 누워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다가 잠깐 쪽잠이 들었는데 정말로 오랜만에 파이가 꿈에 나왔어. 2년 전에 죽은 강아지의 체온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다시 내 옆구리에 느껴졌어. 파이구나. 그냥 알 수 있었어. 파이는 내 옆구리에 찰싹 붙어 낮잠 자는 걸 좋아했잖아. 오른손으로 가만히 털을 쓰다듬었지. 꿈이라서 파이가 이미 죽었다는 걸 알 수가 없었어. 그냥 파이구나. 파이가 내 옆에 있구나. 그것만 느끼면서 계속 쓰다듬었어.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그 체온만으로도 그 아이는 분명히 파이였어. 그래서 그건 꿈이었어. 꿈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본능에 근접할 만큼 충실하게 확신할 수는 없었겠지. 맹목이란 꿈에서만 허락되는 무의식이겠지.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니까 파이..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물장구 소리를 언제나 들을 수 있었다. 다녀왔구나. 하고 온 마음을 다해 반겨주는 소리. 나는 날마다의 귀가 때마다 "다녀왔어. 잘 있었어?"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걸 훨씬 더 감사히 여겼어야 했다. 평행선을 달릴 줄밖에 모를 것 같았던 것이 순간 수평의 균형을 잃고 우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조금 더 빨리 직감했어야 했다. 내 마음의 가장 깊숙한 반대편에서 무게추가 되어주던 존재를 그렇게 손쉽게 잃어버리기 전에. 그랬어야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에 대한 그리움으로 소리 없이 미쳐가고 있다. 너는 그냥 작은 거북이 한 마리가 아니라 내 마지막 룸메이트였다.

거북이 냄새 따문에 어떻게 키우냐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런데 정말이지. 네 비린내조차도 나는 그렇게도 좋아했었다. 햇볓에 꾸덕꾸덕 말라갈 때의 그 특유의 휘발성. 이끼 냄새인지 소라고동 냄새인지 모를 그런 거. 이젠 다시는 맡을 수 없을 그런 것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처럼 놓치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제 와서야 아무 부질도 없을 미련이라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