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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록(iii) 본문

cell/bookshelves

장서록(iii)

onyéul 2022. 2. 16. 21:48

 

댕댕이들과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이 바뀌었는지 오랜만에 장서록을 정리하면서 새삼 깨닫는다.

서점들을 찾아다니며 책 한 권씩 사는 것이 유일한 휴일의 낙이었던 내 삶은 어느덧 사료통과 똥츄와 삑삑이로 가득 차버렸다.

서점을 갈 시간도 책을 살 돈도 책을 읽을 체력도 없어질 정도로 스펙타클한 육아였냐고 하면 과연 그렇다. 이견은 없다.

장서록(i)와 장서록(ii)에 오른 책들 중 상당수가 애들 이빨에 시달리다가 형체를 잃었다는 것만 봐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아이들과 보내는 한 시간이 책 한 권의 가치보다도 훨씬 더 소중하다고 믿고자 한다.

체온을 가진 존재끼리의 유대 관계라는 것은 그 어떤 물질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아이들의 눈높이엔 절대 둘 수 없는 단 하나의 소장 시리즈물이 있다면 그건 단연코 "충사"일 것이다.

절판된 일반판 충사를 구하려고 몇 년을 중고 사이트에 들락거리며 눈팅만 반복해왔던가를 논하자면 하루가 모자르다.

마침내 충사 전 10권을 정가 가격에 -대체로 절판본은 정가보다 웃돈을 주는 경우도 많다- 당근으로 구했을 때의 그 뿌듯함이란.

덤으로 우루시바라 유키 작가의 차기작이었던 "수역"도 손에 넣었지만 역시 데뷔작에 미치지 못 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데뷔 이후 무려 10년 간 연재됐던 충사는 원작이 나온 이후로 다시 10년이 넘도록 재쇄를 거듭하다 애장판까지 발간된 명작이다.

하지만 역시 곰팡이균이 의심되는 쿰쿰한 만화지를 조심스레 한장한장 넘겨가며 읽는 일반판만의 재미를 포기할 수는 없는 법.

만화에는 만화에 어울리는 종이의 질감과 색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만화책에 그토록 정감 어린 향수를 느끼는 일 역시 없었지 않았을까.

고로 책에는 단순히 그 책이 말하는 내용 이상의 무언가가 반드시 담겨져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두려움이나 분노가 눈을 가리도록 놔두지 말아. 모두 각자의 존재 방식대로 존재하는 것뿐."

충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다.

다만 두려움과 분노를 잠재우는 힘은 지식과 지혜에서 나오지만 암흑 속에서도 눈을 뜨는 힘은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충사는 삶과 죽음을 저울질하는 그 놀라운 초연함을 가지고서 담담히 그려낸다. 그럼에도 봄이 오면 꽃이 피듯 돋아나는 희망을.

우리의 삶에도 어느덧 "가짜 봄"이 지나가고 정말로 새순이 돋고 새들이 돌아오는 봄이 오기를.

그리고 이렇게 깊은 명작들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기를. 싱겁더라도 조금은 애틋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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