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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land of blow
방파제 위에 걸터앉아서 한동안 바라본 비양도의 노을.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흐리기만 한 날씨에도 낚시하러 나온 사람들이 조그만 섬인 듯 점점이 박혀있는 해안의 풍경.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는 발걸음만이 또 어딘가로 힘겹게 옮겨갈 뿐이었다.
어물쩍 쏟아진 비에 마음도 하늘처럼 흐렸던 날 비양도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정박한 배의 어깨에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알전구들이 초라하게 포구를 지키고 있다.
초여름. 꽃이 지고 꽃받침 사이로 어린 열매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수줍음을 몰라 붉지 못 하다. 세상을 알아갈수록 이내 익어갈 그 새파란 생명력이 어떻게 조금이나마 부럽지 않을 수 있을까. 꽃이 질 때가 가장 아름다운 거라면 열매에게는 독이 될 헌신을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태어나고 자라나는 그것을 세상은 힘이라고 부른다. 설령 그것으로 인해서 모든 게 다시 쇠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제주도에서는 감저라고 부르는 고구마. 봄이 되기 전에 쪄먹고 남은 것들을 물에 담가 뿌리를 내리게 하고 봄이 돼서 텃밭에 심었다. 어느 계절에나 비가 많이 오는 제주도의 날씨에 안성맞춤인 작물. 우후죽순이라는 말은 땅과 상생하는 모든 푸른 것들에 들어맞는다는 걸 낮은 담장의 작은 텃밭 아래서 이렇게 또 배워간다.
모종을 얻어 심은 뒷마당의 방울토마토. 한낮의 햇빛을 받은 잎에서는 언제나 채 여물지도 않은 열매의 익숙한 즙향 같은 것이 묻어나곤 한다. 가만히 맡으면 숨이 저절로 편안하게 들이쉬어진다. 언제나.
커피박과 대나무잎으로 뒷마당에 심은 방울토마토와 고구마에게 거름으로 줄 때 쓸 퇴비 구덩이를 채웠다. 좋은 거름이 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기다림이다. 사람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햇빛과 빗물과 지렁이의 숨결이 구덩이 안의 설익은 것들을 쓸모가 되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먹고 자란 뿌리들이 다시 다른 누군가의 거름이 되고. 생명은 또다시 순환할 것이다. 하나의 방향으로 흐르지만 반드시 이윽고 만나게 될 거대한 원을 그리고 또 그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