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island of blow

잊히지 않는다는 것 본문

landescape/eclips:e

잊히지 않는다는 것

onyéul 2021. 5. 30. 13:46

 

오늘 아침엔 바닥에 누워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다가 잠깐 쪽잠이 들었는데 정말로 오랜만에 파이가 꿈에 나왔어.

2년 전에 죽은 강아지의 체온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다시 내 옆구리에 느껴졌어.

파이구나. 그냥 알 수 있었어. 파이는 내 옆구리에 찰싹 붙어 낮잠 자는 걸 좋아했잖아. 오른손으로 가만히 털을 쓰다듬었지.

꿈이라서 파이가 이미 죽었다는 걸 알 수가 없었어. 그냥 파이구나. 파이가 내 옆에 있구나. 그것만 느끼면서 계속 쓰다듬었어.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그 체온만으로도 그 아이는 분명히 파이였어. 그래서 그건 꿈이었어.

꿈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본능에 근접할 만큼 충실하게 확신할 수는 없었겠지. 맹목이란 꿈에서만 허락되는 무의식이겠지.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니까 파이도 다시 사라졌어. 나는 다시 혼자 남게 되었어.

너도 파이를 기억하겠지. 파이가 너를 처음 본 날 너를 거의 잡아먹을 뻔했었잖아.

코로 한참 냄새를 맡더니 기어이 먹을 걸로 단단히 오판했었지. 그래서 내가 이 애는 니 간식이 아니라 동생이라고 혼을 내줬었지.

그렇게 너는 파이 동생이 되었고 우리 식구가 되었었는데.

이제는 파이도 타우도 세타 너도 없으니 나는 정말로 진짜배기 고아가 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 뿐이다.

 

네가 먹던 옆새우 통이 아직도 내 방 서랍 한 켠에 있어. 유품인 셈 치고 차마 버리지 못했으니까.

통을 열면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새우 비린내가 내 코를 찌르고. 나는 그 냄새가 가실 동안 또 우울해져서 아무것도 못 하는 거지.

그냥 그런 거야. 그렇게 너 없이도 그냥저냥 시간은 지나간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무의식이 알기 때문이야.

내멋대로 가공된 기억의 파편들이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해 그걸 부정하고 싶어 한다고 해도.

 

꿈에라도 자주 나와주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이제 모든 걸 혼자 버티고 있어.

'landescape > eclips: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의 집념  (0) 2021.06.03
호모사피엔스여 나를 꺼내다오  (0) 2021.06.03
기억, 퇴각  (0) 2021.05.30
시간, 대각선의 그리움  (0) 2021.05.30
근데 정말이지 네 비린내는 비렸었다  (0) 2021.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