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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land of blow
다소 구름 낀 날씨에도 햇빛이 꽤 찬란하게 비추던 이른 아침의 금강교. 사진을 찍은 곳은 금강교 옆의 백제큰다리. 두 다리 모두 자전거로 건널 수 있다.
달빛이 비추는 흐린 새벽하늘 대전 갑천의 강둑 위에서. 손등이 소중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껴보고 싶어서 한밤중의 새벽에 다시 길을 나섰다. 서천까지 다녀온 지 한 달 정도 지난 뒤였고 이번 목적지는 공주였다. 아침안개 냄새를 맡으며 6시간을 달렸고 금강변에서만 라이더의 영원한 친구 고라니를 두 마리나 보았다.
원래는 오래된 담배가게였다는 부여의 책방 세간. 서천에서 다시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일하게 잠시 멈추게 만든 곳이다.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고 나와 내 자전거는 아침부터 줄곧 뙤양볕에 녹아내리느라 온종일 지쳐 있었다. 타는 목마름을 애써 감출 요량으로 십장생의 장수라도 비는 듯이 길고도 긴 이름의 허브티를 한 잔 마셨다. 겸사겸사 낡은 탁상 앞에 앉아서 책도 한 권 들춰봤지만 당연히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이런 쉬어감이 없었더라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지 않았을까. 언젠가 다시 찾아와야지 하는 다짐이 으레 그렇듯 그저 다짐만으로 남아버린 그러나 이따금씩은 그저 그곳으로써 때로 생각나는 곳.
비록 펑크라는 씻을 수 없는 반항을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애초 까마득히 무리였을 장거리 여정을 잘 버텨준 알톤이에게 감사한다. 내 가난한 월급봉투로도 세상 어디로든 걸 수 있다는 걸 네가 증명해준 거란다. 그리고 어쨌거나 우리는 말 그대로 한 배를 타고 함께 제주도로 왔고 고생길은 아직도 창창하게 남아 있다.
금강하구둑에서부터 또다시 20km. 바다가 턱밑이었다. 하지만 이 바다를 보려고 200km 가까이를 달려 왔단 걸 아는 건지 짠내를 맡자마자 자전거는 뻗어버렸다. 하구둑사거리 한 켠의 방역차량 검문소 옆에서 쪼그려 앉아 펑크난 타이어를 고치며 꼬박 2시간을 날려먹었다. 결국 바다는 여기까지로 만족하고 이만 포기해야 했다. 장항항 코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어찌보면 이루지도 못한 목표를 위해서 이 생고생을 다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걸 그간 지나쳐온 길들에서 이미 길어올렸다는 사실에는 애써 고개를 돌린 채로. 나는 결국 이 해 여름에 제대로 된 바다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계절이 한 번 바뀐 뒤에는 눈 돌리면 어디나 바다인 섬에 살게 되었다.
그냥 바다가 보고 싶어서 15시간 동안 자전거를 탔다. 해질녘 무렵부터 죽을 것 같았다. 해가 진 뒤부터는 논두렁의 어딘가로부터 개구리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1km 1km 표지판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 때마다 심장의 박동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당장 오늘 잘 곳은 있나. 마지막 10km를 달리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이었다.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그냥 길에서 뻗어 자야 할 수도 있었다. 밤 10시가 넘어 겨우 도착한 하구둑 근처에서 숙소를 잡고 간신히 차가운 이불 속에 누웠을 때조차 안도보단 걱정이었다. 내일이면 다시 이 길을 되돌아 가야 한다. 아직도 165km 혹은 그 이상이 남아있다고. 다음 날 마침내 아침부터 뒷바퀴 타이어가 펑크나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제..
대전에서 서천 금강하구둑까지 165km. 1박 2일의 왕복 일정에는 330km가 소요됐다. 밥도 굶어가며 하루 15시간 페달을 밟아 초여름의 한낮을 꿋꿋히 관통했다. 아스팔트 냄새에도 바람이 시원하던 억새밭의 자전거길. 맑은 날씨 아래서 강변을 따라 형형색색의 바람개비가 꽤 그럴듯하게 돌아갔다. 바람개비 소리에 섞여 흘러들면 나조차도 그들과 같이 소실점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바람이 멈춰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는 걸 나는 이 먼 길의 강을 다시 거슬러 돌아오면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