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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land of blow
플라스틱과 해양오염의 관계를 다룬 책을 한 권만 꼽으라면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찰스 무어"의 "플라스틱 바다"를 추천하고 싶다. BPA. 프탈레이트. 그 밖의 명명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수많은 화학물질의 종착지는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 플라스틱의 잔류성 유기오염물질은 체내에 축적될 뿐 결코 분해되거나 배출되지 않는다. 바다와 함께 병드는 것은 북극곰이나 펭귄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모두가 서로에게 그 목숨값만큼을 빚지고 사는 것이다. 포스터 "type/a"는 일련의 컨펌을 거쳐서 내가 일하는 가게의 카운터 벽에 붙었다. 하지만 "type/b"는 자체 검열에서 기각돼 쓸쓸한 -아무도 안 보는- 내 블로그에만 소리 없이 게시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어쨌거나 가게라는 것은 매상을 올려줄 손님을 필요로..
현재 집으로 이사하느라 계약기간 1년조차 못 채우고 살다가 나온 서귀포의 1.5룸. 덕분에 보증금 200만원 가운데 100을 날렸지만 100에 200을 날렸던 전적보다야 덜 화려했다고 하겠다. (원룸에서 보증금의 따블을 물어내는 방법이 도저히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면 "수평투상_원룸"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원래는 월세 35에 관리비가 3만원 붙었는데 불로소득 건물주의 워킹푸어 동정론에 힘입어 매달 3만원씩은 무상 면제를 받았다. (부루주아 만세.) 위치가 조금만 시내권에 있었더라도 40은 족히 받았을 년식에다 단촐하게 살기엔 최적인 구조. 처음 계약할 때만 해도 여기서 만수무강할 때까지 오래 살 것만 같아서 이 집이 꼭 내 집 같고 그랬더랬다. 그러나 인생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
제주도로 이주하기 직전까지 살았던 대전 중구의 원룸. 이 빌라는 1층에서 3층까지가 통으로 호수 작명이 독특했다. 301호 다음이 303호 그리고 그 다음이 302호인 식이었다. 내가 살던 곳이 바로 303호였는데 건축허가를 받은 이후에 301호를 쪼개서 만든 오직 임대료만을 위한 방이었다. 덕분에 현관을 직각으로 마주한 벽에는 한때는 301호의 다른 방으로 이어졌을 방문이 벽지만 덧발라진 채 그대로 남아있었다. 요컨대 애초에 한 가구가 살겠금 설계된 공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주거공간이 아니라 301호의 주 공간이었을 뿐이다. 남의 집 거실이던 장소에 억지로 싱크대와 변기와 현관문만 설치해놓고 원룸이라고 세를 받아도 내놓는 족족 나간다고들 했다. 그것이 빈곤층 도시민의 생활상이었고 나는 모텔촌 한복판에..
blurred bluff & sorrow 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를 차렸다. 거의 2년을 미루고 미루던 일을 드디어 해치웠다. 출판사 신고번호 제652-2022-000002호. 앞자리는 지역번호인 것 같고. 아마도 내가 올해 제주도에서 두번째로 출판사를 차린 게 아닌가 싶다. 이번 일로 더 절실하게 깨달은 바지만 제주도의 행정은 육지와는 많이 다르다. 여기저기 알아봤을 땐 출판사를 신고하려면 시청으로 가라고들을 하길래 막연히 서귀포시청엘 먼저 갔더랬다. 그런데 왠지 느낌이 거시기해서 뒤늦게 만덕콜센터에 전화해 물어봤더니만 웬걸 동사무소로 가랜다. 시청이 집에서 멀었으면 무지하게 억울했을 거다. 다시 부랴부랴 동사무소로 달려가서 임대차계약서를 제출하고 서류를 작성했다. 낮에 나왔는데 해가 지고 있었다. 기다림..
언젠가 시집을 내게 된다면 표지로 쓰려고 만들어놓은 이미지. 시는 한 마흔 편 정도는 모인 것 같은데 아직 누구에게도 보여주기가 싫어 그저 신주단지처럼 모셔만 두고 산다. 시집의 이름도 정하지 못했는데 일단 가제는 snailfeet. 하지만 이걸 '달팽이의 발'로 직역하면 뭔가 상당히 웃길 것 같아서 다른 적당한 이름이 떠오를 때까지 덧없이 기다리는 중이다. 정말 내가 시집을 낼 날이 오기는 올까. 글 쓰고 싶다는 말이야 밥 먹듯이 하곤 했지만 내기 진심으로 모든 걸 걸고 글을 써본 적이나 있기는 한 걸까. 어차피 문학해서 먹고 살 길은 없다는 때깔 좋은 핑계로 나 자신을 비춰보는 일로부터 그저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샘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시간이 아무리 새벽 언저리로 치달려도 도무지 밤 같지가..
어릴 때부터 안톤 체홉을 너무 좋아해서 나도 요절을 하고 싶었다. 김광석은 마흔둘에 죽었고 체홉은 마흔넷에 죽었으니 나는 한 마흔셋에 죽으면 뽀대도 나고 적당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아직도 20년이나 더 남았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두렵게 느껴젔던 적은 좀처럼 없었다. 늙음보다 더 불행한 것은 쉽게 녹슬지도 못하는 비루한 무채색의 젊음일 것이다. 기왕에 그렇다보니 빛을 다루는 일에나 더 익숙해지면 좋겠다. 죽음을 앞두고서 "검은 빛이 보인다"라고 했던 이는 또 언제적의 선인이었는지를 간과하기 위해서라도.
10년을 넘게 키운 개가 죽은 후 49일이 지날 때까지 육식을 할 수가 없었다. 종교는 없었지만 왜 하필 49제라는 것을 지내는지 알 것 같은 시간들이 흘렀다. 그것은 예컨대 비애의 공소시효 같은 것이었다. 처음 일주일은 길을 가다가 돼지고기 굽는 냄새만 맡아도 구역이 났다. 태워지는 그것이 살아있던 무언가의 살코기라는 사실을 이성이 아닌 본능으로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햄이 들어간 줄 모르고 사먹은 빵에서 물컹하는 육향을 맡았을 때는 혓바닥을 뜯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보름 정도가 지나자 대부분의 음식에 들어가는 가공육에는 차츰 거부감이 없어졌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자 고깃집에서 나는 살 타는 냄새가 다시 익히 알던 예의 입맛 도는 냄새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49일을 꼬박 채워 육식을 거부했던 것은 ..